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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31] 흥부가족상/이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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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처지의 흥부가 많은 자식을 낳아 놓은 것을 두고 형 놀부는 온갖 악담을 퍼붓는다. 

   스물다섯이나 되는 자식, 다른 사람 자식 낳듯 한 배에 하나 낳아 삼사 세 된 연후에 낳고 낳고 했으면 사십 못다되어 그리 많이 낳겄느냐. 한 해에 한 배씩 한 배에 두셋씩 낳아 놓았구나. 

   이본(異本)에 따라 자식 수는 다르지만 대체로 흥부는 세기도 힘들 정도의 많은 자식을 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대책 없이 ‘주렁주렁’ 아이만 생산했다고 구박받던 흥부가 저출산 인구절벽의 시대에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다자녀 가족에게 ‘흥부가족상’이 주어지는가 하면 매체들은 다자녀 가족의 ‘흐뭇한’ 일상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려고 한다.
 

무대책한 흥부가 살던 때도 낙태와 피임이 

  흥부 자식들은 “세상에 난 연후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쳐 본 일 없고 한 번도 문턱 밖에 발 디뎌 본 일 없으며 다른 사람 얼굴 보아 소리 들어본 일 없고 그저 앉아 큰 것이라.” 그래서 다른 집 자식들처럼 일을 해서 집안을 돕기는 고사하고 스무살이나 먹도록 제비새끼처럼 “어매 밥, 어매 밥”만 외쳐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흥부가 자식을 많이 낳은 것은 생명에 대한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라기보다 피임이나 낙태의 지식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형 놀부는 매년 적어도 한 아이 이상을 낳는 동생의 한심한 상황이 음색(淫色)을 띤 흥부 마누라 때문이라고 한다. 놀부의 진단을 수용하기는 어렵지만, 어쨌거나 흥부는 생기는 대로 낳아야 하는 그 시대의 한계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시대에도 피임이나 낙태의 ‘과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위 의술서에는 임신 출산과 관련된 처방만도 수십 가지가 된다. 평생 임신하지 않도록 하거나 더 이상 임신을 하지 않도록 하는 단산방(斷産方)에도 여러 처방이 있다. 태아를 지우거나 낙태를 위한 방법도 다양했는데, 배에 뜸을 뜨거나 우슬탕(牛膝湯)이나 계심산(桂心散) 등을 복용하도록 했다. 그만큼 단산이나 낙태의 요구가 많았다는 뜻인데, 원치 않은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임부 스스로 행한 낙태는 범죄로 인식되지 않았고, 타인을 낙태케 한 경우는 상해죄로 다스려졌다. 낙태를 타태(墮胎), 절산(絶産)이라고도 했다. 그 시대 젊은 여성의 죽음은 거의 임신과 출산과 관련되었다. 그런 점에서 임신과 출산의 경험은 여성에게 축복이기도 하지만 재앙이기도 했다.

   한편 여자아이를 남자아이로 바꾸는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도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태아감별을 통해 선별 출산이 이루어진 때를 생각하면 대놓고 비웃을 일은 아니다. 과학의 발달 정도에 따라 처방이 달랐을 뿐인데, 『득효방』에는 임신한 지 3개월째는 아직 혈맥이 흐르지 않아 모양새가 변할 수 있고, 남아인지 여아인지 정해지지 않아서 약을 먹거나 방법을 써서 사내아이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임신 초기에 임부(妊婦) 모르게 자리 밑에 도끼를 놓아두는 것인데, 이러한 속방(俗方)에서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읽을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낙태죄 폐지를 위한 시민들의 청원이 쇄도하고 있다. 태아의 생명권이냐 임부(妊婦)의 선택권이냐를 놓고 대립하는 단선 구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무엇보다 ‘생명존중의 윤리’라는 원론적 주장만으로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여성과 태아의 현실에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태아의 존재에 대해서는 자신의 일부가 된 임부보다 더 절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 생명을 지키려면 임부를 보호해야

 

  ‘합법적’이지 않은 생명의 잉태는 늘 논란거리지만 특히 조선에서는 정절의 법과 맞물려 극심한 상황으로 내몰리곤 했다. 성종 17년(1486) 왕실의 종친 덕성군의 후처 구씨가 아이를 출산한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는데, 덕성군은 13년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과거 준비 차 금산에서 올라와 구씨의 집에 기숙하던 이성(異姓)의 조카와 사통하여 낳은 아이였다. 처음 이 소식이 보고되었을 때는 왕과 대신들은 왕실을 욕보인 구씨에게 화살을 겨누었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비난의 화살은 덕성군의 양자 영인군으로 옮겨갔다.

   밝혀진바 영인군은 덕성군의 토지와 노비를 모두 탈취하여 의모(義母) 구씨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했는데, 유일하게 남은 가옥마저도 뺏을 궁리를 하던 중이었다. 구씨가 단지 노비 2명과 빈궁하게 사는데도 양자 영인군은 어미인 그녀를 전혀 돌보지 않았고, 구씨의 실행(失行)을 알고도 일이 더 커지도록 묵인했음이 밝혀졌다. 어미 구씨의 출산이 임박하자 아내와 유모를 보내 지키게 하며 증거를 잡고자 혈안이 되었다. 구씨와 그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내버려 달라고 빌면서 감추려 하자 유모를 시켜 아이를 빼앗고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한 것이다. 자신의 출산이 세상에 알려지자 구씨는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이 사건을 접한 왕과 대신들은 어미의 과실을 덮어주고 지켜주어야 할 자식에게 죄를 물었다. 이 말은 곧 가족의 배려가 있었다면 구씨의 출산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부의 취약한 부분을 이용하려 한 영인군은 유배형에 처해 끝내 풀려나지 못했다. 제한적이나마 조선의 정치가들은 ‘부정’한 잉태를 하게 된 여성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했다.

   생명이란 잉태되고 태어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보살핌을 통해 양육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태어날 아이가 놓일 환경이나 삶의 조건도 태아의 생명권에 포함된다. 물론 현재의 낙태법에는 임부를 보호하는 예외 조항을 두고 있지만, 낙태의 당위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임부가 겪는 고충들이 사례로 보고되고 있다. 임신과 출산 또는 낙태와 관련된 법은 임부 그 자신의 경험과 상황을 소중히 담아내는 방향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조선시대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 글쓴이 / 이숙인(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저서 <신사임당>,<정절의 역사>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노년의 풍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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