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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당] 맹자의 호연지기 양성론에 대하여(1) / 성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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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호연지기 양성론에 대하여 (성태용/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


1. 시작하는 말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맹자가 호연지기의 양성을 주장하였다는 사실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고,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말은 일상적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러나 막상 성선설의 본래적인 의미에 대하여는 적지 않은 오해들이 있고 또 그 본래적인 의미에 대하여서도 이설이 구구하다.호연지기란 말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며, 그것이 맹자의 인성론과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는 거의 논의한 사람이 없는 듯하다. 즉, 맹자의 인성론 내지 인간관과는 거의 무관하게 별개로 호연지기의 의므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맹자의 호연지기 양성론은 맹자의 인간관에서 보면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으며, 성선설을 비롯한 맹자의 심성론과 호연지기 양성의 수양론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논의에서 보여질 수 있듯이, 맹자의 인간관과 수양론은 하나의 꽉 짜여진 틀을 형성하고 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빠져도 맹자의 인간관과 수양론은 불구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은 맹자의 호연지기 양성론을 중심으로 인간관과 호연지기 양성론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이러한 작업에서 필자는 호연지기를 논하고 있는 <맹자>"공손추"편의 "부동심" 장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주석을 해나가는 방식을 취하면서,


호연지기를 기름은 바로 '큰 몸'을 기름에 다름 아니다. 호연지기는 '큰 몸'의 기운이다. '큰 몸'은 그 자체의 지향성으로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기운으로서 호연지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힘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 장의 전후 문맥 관계와 <맹자> 다른 부분들에 흩어져 나타나고 있는 자료들을 망라하여 나감으로써 고전 해석의 한 방식을 보이려 한다. 좀 길지만 <맹자>'부동심' 장을 문제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대로 옮기고 논의를 진행하기로 하겠다.


(공손추의 물음에 발단하여 여러 사람의 부동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고자[告子]의 부동심과 맹자의 부동심의 차이를 묻는 공손추에게 맹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고자는 '남의 말에 이해가 안 가거든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 마음을 쓰지 말며, 마음에 이해가 안 가거든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 기를 부리지 말라'하였는데 마음에 이해가 안 가거든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 기를 부리지 말라는 것은 좋으나 남의 말에 이해가 안 가거든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 마음을 쓰지 말라는 것은 안될 말이다. 대개 뜻(志)은 기운의 통솔자요 기운은 몸을 통솔하는 것이니, 뜻은 지극한 것이고 기운은 이에 다음 가는 것이다. 그래서 '뜻을  굳게 지니고 기운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뜻은 지극한 것이고 기운은 이네 다음 간다고 하시면서, 또 뜻을 굳게 지니되 그 기운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뜻이 한결같으면 기운을 움직이고, 기운이 한결같으면 뜻을 움직이네."

"그러면 선생님은 어느 면을 잘 하십니까?"

""나는 남이 하는 말을 아네. 그리고 나는 내 호연지기를 잘 기르네"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하십니까?"

"말로 설명하기 어렵네. 그 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어서, 곧게 길러 해치지 않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네. 그 기는 도의에 배합되는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기가 굶주리네. 이긋은 의로운 행위의 반복에 의하여 길러지는 것이지 밖에서 의가 엄습해 와서 얻어진 것이 아니네.행위가 양심에 쾌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이 기가 굶주리고 마네. 그래서 나는 고자가 '의(義)'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지. 그는 '의'를 마음 밖의 것으로 보았거든.... 사람이 이 기를 기르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일삼아 하되 꼭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예기하지 말아야 하네. 마음으로 잊지 말되, 무리하게 기르려고 해서는 안되네. 송나가 사람 가운데 자기의 곡식 싹이 잘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싹을 잡아 뽑은 사람이 있었네......



위의 인묭문에서 우선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호연지기론이 부동심의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호연지기의 양성은 부동심을 이루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점에서 맹자는 고자의 부동심의 방법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남의 말을 잘 알고, 또 자신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맹자의 부동심의 방법이라고 할 수 ㅣㅇㅆ을 것이다. 이 글은 맹자의 호연지기론에 초점을 맞추되, 그러한 작업을 통하여 부동심 장의 전체 의미가 드러나게끔 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고자의 부동심에 대한 맹자의 비판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그 다음에 나오는 '기(氣)'의 의미에 대한 맹자의 발언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만 호연지기의 의미가 올바로 이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2. '큰 몸'과 '작은 몸'


기(氣)란 몸에 충만되어 몸을 부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선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맹자가 "기는 몸에 충만된 것이다"고 한 부분이다. 호연지기의 의미는 '넓고 큰 기운'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기운이라는 말은 맹자가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원래 기의 의미는 우주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작용하는 물질적 원리나 힘을 뜻하였다. 이것이 어떤 정신적인 상태 내지는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도 또한 맹자가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맹자는 자신이 말하는 기란 몸에 충만하여 있으면서 몸을 부리는 기운이라는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이 기는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기운이 한 군데 모이면 그것이 또한 뜻을 움직이기도 한다. 대체적으로는 뜻에 따라 기운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에 맹자는 "뜻은 기를 통솔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 있어서 기운을 기르는 것도 뜻을 전일하게 가짐에 그 요체가 있다. 이 문제는 좀 뒤에 논할 것이기에 여기서는 자세히 살피지 않겠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기운이 몸에 가득찬 것이라고 했을 때 이 기운이 육체적 기운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육체적 기운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맹자에 있어서 호연지기를 양성한다는 것은 바로 육체적 기운을 양성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맹자의 논지로 보아서 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육체에 가득하되 육체적 기운과는 다른 기운을 말하는 것인가? 그 또한 그렇지 않다.


맹자는 우리의 몸에 '큰 몸'과 '작은몸' 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절의 결론을 앞질러 말한다면 호영ㄴ지기는 바로 '큰 몸'과 '작은 몸'의 개념이다. 맹자의 인간 이해는 바로 이 '큰 몸'과 '작은 몸'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모두가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대인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인이 되는 까닭은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에게 몸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는데 '큰 몸'을 기르면 대인이 되고 '작은 몸'을 기르면 소인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대인, 소인과 연결되면서 '큰 몸'은 귀한 것이요 '작은 몸'은 천한 것이라는 가치 판단이 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작은 몸'은 바로 감관작용을 포괄하는 육체적인 요소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자연 '큰 몸'은 정신적인 층면을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맹자에서는 그것이 '마음'(心)이라고 표현된다. 직접 맹자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눈과 귀 등의 감관은 생각하지 못한다.... 마음의 기능은 생각이다. 생각하면 알고 생각하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이는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다.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이 빼앗지 못한다. 이것이 대인인 것이다.


이렇게 '큰 몸'과 '작은 몸'을 확실히 구분하는 맹자의 사유 틀 속에서는 '작은 몸'은 '작은 몸' 나름대로 기운을 지니고 있으며, '큰 몸'은 '큰 몸' 나름대로 기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맹자가 '큰 몸'을 기르느냐 '작은 몸'을 기르느냐를 정원사가 좋은 묘목을 기르느냐 아니면 가시나무와 같은 쓸데없는 묘목을 기르느냐로 비유한 곳에서도 시사를 받을 수 있다. 즉 작은 몸은 '작은 몸' 나름대로 하나의 몸이요, '큰 몸'은 '큰 몸'나름대로 하나의 몸이다.

물론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작은 몸'이고 '작은 몸'의 생리와 작용은 누구나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큰 몸'은 '작은 몸'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생리와 작용을 지닌다고 맹자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육체를 기르듯 '큰 몸'도 길러질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 표현에서 심신을 기른다고 하지만 정말로 '기른다'는 표현을 적용하여 가장 알맞은 것은 맹자의 수양론인 것이다.


To be continued...........


출처(Source): 성태용 (1990). 맹자의 호연지기 양성론에 대하여. 철학과 현실 , 1990.11, 231-244 (14 pages)

※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함(오리서원 林輸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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