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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당] 맹자의 호연지기 양성론에 대하여(2)/ 성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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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호연지기는 도의가 없으면 '굶주린다'


맹자가 호연지기를 '기른다' 했을 때 그 기름의 방식은 우리의 육체의 기운을 기르는 것과 비교해볼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여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맹자가 "호연지기는 의(義)와 도(道)를 짝하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린다"는 표현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치 우리의 육체가 그의 유지에 필요한 자양을 섭취하지 못했을 때의 굶주림을 연상시킨다. 육체는 굶주리면 그 기운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큰 몸'인 마음의 기운도 굶주리는 것인가? 맹자에 있어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굶주린다' 다음에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인 집의(集義)와 연결시키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하여진다. 맹자는 의로운 행위를 계속 쌓아나가는 데서 호연지기가 생기는 것이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육체가 본래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듯이 '큰 몸'도 본래적인 그 기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맹자는 분명하게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그가 우산의 나무를 비유로 들면 '야기(夜氣)'를 말할 때 분명 이러한 생각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맹자는 산의 나무들이 밤낮으로 생장하는 기운이 있고 또 비 이슬이 적셔주면 자연 새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에도 낮과 밤으로 생장하는 기운이 있어 새벽 사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의 맑은 기운은 본래적인 선한 마음에 가까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야기는 호연지기와 별개의 기운이 아니다. 단지 사람이 편히 쉬는 밤이면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대체의 기운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야기가 소극적인 측면에서, 즉 해치지 안하으면 회복되는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라면, 적극적으로는 의로운 행위를 반복하여 나가는 것이 대체의 기운을 키우는 것이요, 이것이 호연지기의 적극적인 양성법이다. 이렇게 사람을 '큰 몸'과 '작은 몸'으로 나누어 보고 그 각각의 기운을 기르는 방법을 말하는 것은 맹자의 인성론, 즉 성선설과의 관계에서 관찰할 때 그 의미가 분명하여진다.



4. '작은 몸'에는 '작은 몸'의 지향성이 있고 '큰 몸'에는 '큰 몸'의 지향성이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큰 몸'과 '작은 몸'은 그 각각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그릭고 그 기운은 그 각각에 적절한 자양을 공급함에 의해서 증진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작은 몸' 즉 육체는 본래적인 생리가 있어 그 생리에 의해 욕구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킴이 '작은 몸'을 잘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에 있어서는 '큰 몸'도 마찬가지로 생리적인 지향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맹자에 의하면 '작은 몸'에 속하는 각 감관들 즉 눈, 퀴, 입 등은 각각 본래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좋아함은 모든 사람에 공통적인 것이라고 본다. 즉 훌륭한 음악가의 음악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게 마련이고, 뛰어난 요리상의 요리사의 요리는 모든 사람의 입이 즐기게 마련이며, 아름다운 사람은 모두 아릅답다고 보게 마련이라고 맹자는 말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큰 몸' 즉 마음에도 공통적으로 좋아하고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맹자에 의하면 그것은 '의(義)'와 '리(理)'이다. 여기서 우리는 맹자가 호연지기는 도와 의를 짝하며, 그것이 없으면 굶주린다고 말한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없으면 호연지기가 굶주리는 도와 의와 여기서 '큰 몸' 즉 마음이 좋아한다는 의와 리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실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의(道義)와 리의(理義)를 같은 것으로 보고 또 그것을 '큰 몸'의 지향대상으로 볼 때 고자가 '의(義)'를 외적인 것으로 본 것을 비판한 말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의'는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서 객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 있는 그에 대한 고유한 또하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 즉 '큰 몸'은 리(理)와 의(義) 또는 도의(道義)를 좋아하고 그것이 없으면 굶주린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육체의 생리적인 지향성이 적절하게 충족되면 그 육체가 생기를 띠고, 그것이 적절하게 충족되지 않으면 기운을 읽는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큰 몸'의 기운이 충실해지거나  저하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리적인 지향성 바로 이것이 맹자에 있어서의 '성(性)'의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육체는 육체대로 생리적인 지향성을 지니고 있으니 또한 그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큰 몸'의 본성은 바로 의리(義理)를 좋아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맹자는 두 개의 본성 가운데 '큰 몸'의 본성만을 기준으로 하여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는 것인가? 작은 몸의 본성을 중심으로 하여 말한다면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한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맹자의 답은 바로 인간의 종자에 의거하여 '작은 몸'의 본성은 인간만이 지닌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니라 동물들과 공통적인 것이기에 그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없다는 것이다. 즉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매우 미미한데, 보통 사람은 이를 버리고 군자는 이를 보존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큰 몸'의 본성만을 인간의  성으로 인정하는 배후에는 또한 '큰 몸'의 본성은 천(天)이 부여한 고귀한 것으로 그것을 따르고 보존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맹자의 표현에 따르면 입이 좋은 맛을 찾는 것이나 귀가 좋은 소리를 좋아하는 것이나 육체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나 모두 성(性)이지만 하늘의 명이 있기에 그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큰 몸'의 지향성인 의리 등은 하늘의 명이지만 그것이 타고  나면서 주어진 측면이 있기에 그것을 천명으로만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성은 앞에서 생리적인 지향성이라고 표현했듯이 그것의 지향성이 충족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쾌(快), 불쾌(不快)의 정서를 낳는다. 그리고 그 이전에 그 지향성은 어떤 대상들에 대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며, 바라거나 바라지 않는 등의 감정을 낳는다. 그리고 좋아하거나 바라는 대상이 주어지면 쾌의 정서, 싫어하는 대상이 주어지면 불쾌의 경험을 그리고 이 지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방향으로의 행위를 낳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방향으로의 행위를 촉발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지향성을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 정적인 상태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어떤 기회가 주어지면 일정한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촉발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큰 몸'과 '작은 몸'에 각각 어떤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촉발할 수 있을 힘의 근원을 지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지향성도 어떤 의미에서의 '힘'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중력처럼 가장 근원적으로 작용하는 힘이요, 그 다음의 모든 운동들은 이 근원적인 힘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작은 몸'에 '큰 몸'에 각각의 성이 인정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맹자의 성선설의 핵심적인 의미이다. 혹 이 중요성을 소홀히 보고 맹자와 순자가 근본적으로는 같은 주장을 하였다고 본다든가 하는 것은 근본을 보지 못한 것이다. 맹자에 있어서는 인간의 행위를 촉발하는 근원적인 힘이 두 가지가 인정되고 있다는 것 이 점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큰 몸'의 지향성은 '작은 몸'의 지향성에 비하면 매우 미미하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은 바로 이 '큰 몸'의 지향성에 있는 것이며,그것이 하늘의 명임을 알고 그것에 따르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늘의 명을 아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그것이 '작은 몸'의 지향성에 비하면 미미한 '큰 몸'의 지향성을 따라야 하는 당위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큰 몸', '작은 몸'의 욕구가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 위에서 말한 당위성에 따라 마땅히 '큰 몸'의 욕구를 따라야만 한다. 물고기와 곰 발바닥 모두가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두 가지를 함게 얻지 못할 경우 곰 발바닥을 택하는 것처럼, 육체적인 삶과 의로움을 취햐야 한다. 맹자는 삶에 대한 욕구보다 더 강한 욕구가 있고, 이런 마음은 현자만이 지닌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데 현자는 이를 잃지 않을 따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맹자의 전편의 논지로 보아서 '큰 몸'의 욕구가 '작은 몸'의 욕구보다 더 강하다고 맹자가 주장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일반 백성은 고정적인 생계의 수단이 없으면 못할 짓이 없게 되며, 고정적인 생계수단이 없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선비뿐이라고 말하고 ㅣㅇㅆ으니, 이는 선비만이 하늘이 준 '큰 몸'의 귀함을 알아서 이를 보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어쨌든 많은 경우 '작은 몸'의 욕구와 큰 몸의 욕구는 충돌을 일을킬 수 있고, 그 경우 '큰 몸'의 욕구를  따라야 함에도 '작은 몸'의 욕구에 굴복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엔 '큰 몸'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불쾌의 정서가 일어날 것이다.


To be continued......................


출처(Source): 성태용 (1990). 맹자의 호연지기 양성론에 대하여. 철학과 현실 , 1990.11, 231-244 (14 pages)

※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함(오리서원 林輸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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