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인문학당] 맹자의 호연지기 양성론에 대하여(3)/ 성태용
조회수 2452
파일첨부

5. 행위가 마음에 유쾌하지 않으면 호연지기가 굶주린다.


앞에 말했듯이 맹자는 호연지기가 의로운 행위를 반복함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작은 몸'의 욕구를 지속적으로 충족시켜줌에 의하여 '작은 몸'이 기운차게 되는 것과 같은 양상임을 앞에서 이미 살피었다. 그런데 '작은 몸'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거나 욕구에 맞지 않는 것들이 주어지면 '작은 몸'은 기운을 잃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큰 몸'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큰 몸 '의 기운 즉 호연지기가 힘을 잃게 된다. 맹자는 이런 경우를 "행위가 마음에 유쾌하지 않으면 호연지기가 굶주린다"고 표현한다. 앞에서 이 '굶주린다'는 표현에 유의해야 함을 말하였는데, 이는 우리가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몸이 음식을 섭취하지 않았을 때의 굶주림을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이다. 호연지기를 바로 '큰 몸'의 기운으로 보는 단서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호연지기의 굶주림을 막고 그것을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큰 몸'의 욕구가 지속적으로 또 적절하게 충족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는 일을 하되 꼭 언제까지 이런 수준에 달하여야 한다고 기필하지 않으며, 마음에 늘 두되 억지로 자라게 하려고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맹자가 "곡식 싹을 뽑아 자라는 것을 돕는 짓"의 예로서 비판하였듯이 식물의 생장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에 의하여 적절하게 보살피면, 그 본래적인 생명력에 의하여 자연히 자라는 것이다. 이를 억지로 자라게 하려는 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 그대로 내팽개쳐 두면 그것은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인간의 육체적 섭생과도 이는 유사하다. 식욕을 무한적으로 충족시키려 한다면 오히려 배탈이 날 수 있다. 자연적인 욕구를 무시하면 또는 영양 결핍이 된다. 호연지기의 양성 방법도 이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맹자의 수양론에서 얼마나 자주 식물을 키우는 예가 자주 등장하는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바로 호연지기의 정체와 그것을 키우는 방법을 암암리에 지시하여 주고 있다.


6. 호연지기 양성에 의해 부동심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의로운 행위의 선택을 보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호연지기에 대한 이야기가 부동심의 문제에서 출발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결국 호연지기도 부동심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결되는가.


맹자는 고자의 부동심의 방법을 비판하면서 호연지기론을 제시한다. 이 맹자의 비판은 여러 사람의 해석이 엇갈리는 부분이다. 그 중 노사광같은 이는 여기서 말하는 '말'을 남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논리라고 보는데, 이는 고전 해석의 기본을 모르는 것이다. 이 장의 바로 뒤에는 맹자가 자신은 "남이 하는 말을 안다"고 내세우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여기에서의 '말'을 주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의 전혀 다른 곳에서 이 구절의 의미를 밝혀주는 대목이 있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큰 몸'과 '작은 몸'에 대하여 논한 <고자> 상편에 나오는 말이 그것이다. 거기에서는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이 빼앗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바로 고자늬 "남의 말에서 그 뜻을 얻지 못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는"에 대한 비판의 요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큰 몸'을 세우면 '작은 몸'이 그것을 빼앗지 못한다"고 한 것은 "큰 몸'을 확림함에 의하여 '작은 몸'의 욕구에 의하여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니, 맹자의 부동심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부터 이미 '큰 몸'과 '작은 몸'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암암리에 호연지기론의 단서를 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맹자가 "마음에 이해가 안 가거든 이것을 구하기 위하여 기를 부리지 말라" 한 것은 다음의 "뜻은 기운을 거느리는 것이다"라는 말과 연결하여 볼 때 마음에 불안한 요소가 있으면 그것을 억지로 자기 합리화시켜 안정시키려 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증자의 "스스로 반성하여 곧으면 천만 사람이라도 상대할 수 있다. 스스로 반성하여 곧지 못하면 비록 하찮은 필부라도 내가 겁줄 수 없다"는 부동심의 방법과 연결된다. 부동심 장에서 언급한 다른 인물들 즉 복 귱유, 맹 시사 등은 모두 억지로 기운의 힘을 빌려 부동심을 도모한 예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뜻이 기운을 이끄는 것이라면 뜻만을 유지하면 되지 무엇 때문에 호연지기를 양성하는가 하는 반문이 나올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바로 맹자가 부동심 장에서 말하였듯이 "뜻이 전일하면 기운을 움직이고, 기운이 전일하면  또한 뜻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운을 잘 길러 해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기운이라는 것도 또한 '작은 몸'의 기운 일 수는 없고 역시 '큰 몸'의 기운인 호연지기이다. 맹자가 뒤에서 "나는 말을 안다.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한 것 가운데 "나는 말을 안다"는 것은 고자의 "말에서 그 뜻을 얻지 못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느느 부동심의 방법에 대비되는 자신의 부동심을 밝힌 것이요,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는 것은 바로 이 기운을 잘 길러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주석인 것이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역시 '큰 몸'과 '작은 몸'과의 관계에 있다. '큰 몸'을 기른다고 할 때 그 '큰 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다. 그것을 기른다는 것은 자연 그것의 기운을 기른다는 쪽으로 생각되어질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육체를 기르듯 그 형체와 크기를 기른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것의 기운을 기를 때 그것은 앞에서의 경우와 같이 그것이 뜻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큰 몸'의 지향성을 확고하게 보장하는 것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이 빼앗지 못한다"는 것은 '큰 몸'의 기가 강건하여져서 어떠한 '큰 몸'의 지향성을 위협하는 조건에도 굴하지 않는 그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몸이 허약하면 조그만 악조건에도 견디지 못하나, 그 기운이 충실하면 극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호연지기는 맹자의 표현에 의하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어 곧바로 길러해치지 않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찬다." 이러한 기운을 이길 것은 없기에 호연지기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큰 몸'이 손상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작은 몸'의 욕구와의 갈등 관계일 것이다. 이렇게 호연지기가 잘 길러진 상태를 맹자는 직접 호연지기와 연결시키지는 않았으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하라는 넓은 곳을 자기의 거처로 삼으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하고.... 위협이나 무력이 그를 굽히게 할 수 없으며, 부귀가 그를 거기에 탐닉하게 할 수 없으니 이를 대장부라 한다."


여기서 맹자의 호연지기론은 완성을 보게 된다. 호연지기를 기름은 바로 '큰 몸'을 기름에 다름아니다. 호연지기는 '큰 몸'의 기운이다. '큰 몸'은 그 자체의 지향성으로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 기운으로서 호연지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힘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성은 물체에 있어서의 중력과 마찬가지로 가장 근본적이며 어떤 상태를 이룬 것이며, 그 자체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작은 몸'과의 갈등 상황 등에서 '큰 몸'을 지키게 할 수 있는 힘이다. 본성은 그 자체로서는 강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에 꾸준히 따름으로써 이차적인 힘의 상태를 형성함으로써 그게 대한 지속적인 선택을 보장받을 수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바로 호연지기이다.


7.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논의의 편의상 '큰 몸'과 '작은 몸'의 구분을 한 개인의 차원에서 육체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쇼오로 대치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제에 있어서는 중요한 요소를 이룹러 빼놓고 이야기한 것이다. 한 개인의 차원에서라면 육체와 정신이 위에서 논의하였듯 언제나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설사 그러한 요소가 있더라도 맹자가 강조한 것은 그러한 점은 아니다. 맹자가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그 속에 있는 도덕적 지향성 때문이었다. 마음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이룰 수 있는 본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마음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고귀한 것이며, 그 본성에 따라 인과 의를 이루는 것은 인간의 사명이다. 그런 점에서 맹자는 인과 의를 "하늘이 내린 벼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도덕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특히 유가에서의 도덕의 근본은 타인에 대한 고려와 사랑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맹자가 '큰 몸'과 '작은 몸'과의 갈등을 말할 때는 바로 타인에 대한 고려와 사랑이라는 '큰 몸'의 본성을 어기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조그만 자기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작은 몸'의 의미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맹자의 생각에 바탕을 이루는 것은 역시 위에서 살펴본 방식의 '큰 몸'과 '작은 몸'의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볼 때에만 호연지기의 의미가 바로 드러날 수 있다. 맹자가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망이 적은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했을 때는 사회적인 관계 등을 떠나 바로 '작은 몸'의 욕망과 '큰 몸'인 마음을 대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글은 '큰 몸', '작은 몸'의 구분에 바탕하여 호연지기의 의미를 빍히려 하였기에 맹자의 사유를 지나치게 도식적인 특 속에서 해석한 점이 있다. 그 중에서도 '큰 몸'을 '마음'이라 하였을 때 '작은 몸'의 욕구나 정서 등도 결국은 마음에 반영된다는 점 등을 무시하고 시종일관 큰 몸과 작은 몸을 대비시키는 선에서 논의를 진행시킨 점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논한 방식으로  호연지기를 이해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장점은 이러한 문제점들에 의해 버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문제점들은 호연지기의 의미를 뚜렷하게 드러내기 ㅜ이해 단적으로 대체와 소체를 대비한 데서 생긴 것이요,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니다. 남겨진 문제들을 보다 상세한 맹자의 심성론에 대한 연구를 통해 보충할 때 이 글의 논지를 잇는 선에서 완결된 맹자 사상의 이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출처(Source): 성태용 (1990). 맹자의 호연지기 양성론에 대하여. 철학과 현실 , 1990.11, 231-244 (14 pages)

※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함(오리서원 林輸正)

 

이전글 [인문학당 강의자료]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 한형조
다음글 [인문학당] 맹자의 호연지기 양성론에 대하여(2)/ 성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