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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당 강의자료]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 한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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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다산 아카데미 강의자료]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 글쓴이(강사) :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철학 & 고전한학)

 

1. 

남명을 펼치면 곧바로 닥쳐오는 것이 바로 <>의 이미지이다.

 

불 속에서 하얀 칼날 뽑아 내니,

서리 같은 빛 달에까지 닿아 흐르네.

견우 북두 떠 있는 넓디넓은 하늘에,

정신은 놀되 칼날은 놀지 않는다.“

 

칼날과 서릿발, 하얗고 서늘한 빛, 마음에 한 점 티끌도 허용하지 않고, 판단에 있어 한 순간의 주저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다.

 

남명 50세 되던 기유, 지우들과 감악산 아래에서 멱을 감으며 읊은 시가 있다.

 

사십 년 동안 더렵혀져 온 몸,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싹 씻어 버린다.

만약 티끌이 오장에서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쳐 보내리라.

 

누가 이를 유학자의 시라 하겠는가. 여기서 칼날은 자신을 향해 있다.

 

신명사도(神明舍圖)는 남명의 <칼날 같은 수양론>을 간명하게 담고 있는 그의 핵심 저작이다.

마음, 즉 태일천군(太一眞君)은 외물의 유혹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받고 침탈당한다. 외적 자극은 성성(惺惺)의 자각을 읽으면 언제든지 방비를 뚫고 침범하여, 마음의 고요를 뒤흔든다. <기미>에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대처해야 한다. 남명은 이를 시살(?殺), 즉 적을 섬멸하듯 쳐죽여야 한다고 썼다. 그것을 그는 항우의 사생결단의 각오에 비겼다.

 

밥 해먹던 솥도 깨부수고 주둔하던 막사도 불사르고, 타고 왔던 배도 불지른 뒤, 사흘 먹을 식량만 가지고 사졸들에게 죽지 않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와 같이 해야 비로소 섬멸(시살)할 수 있다.

 

우암 송시열은 신도비명에서 남명을 일러,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극기(克己)했다고 썼다.

 

남명은 수양론을 <칼 하나>로 대신했다. 경전에 주해를 달지 않고, 이기성명(理氣性命)에 대한 이론적 천착을 꺼린 것도 이 생각과 닿아 있다.

 

그는 경전이라는 시에서, 세상의 다섯 수레에 실린 책들이 단 한가지 목표, 즉 무사()를 향해 있다고 읊었다.(五事書在一無邪) 그래서 ()를 막고 성()을 보존하라(開邪存誠)”역전(易轉)과 이천(伊川)의 격언을 좋아했다. 이 단순하고 명쾌하고 직설적인, 그러면서도 험하기가 천길 벼랑인 이 수양론이 남명 학문의 요체이다.

 


2. 

그의 칼은 또한 밖으로도 뻗어 있다.

 

1) 그는 56세 되던 해, 단성 현감에 제수되자, 사양하는 글에서, “문정왕후를 한 과부로, 임금을 한 고아로 표현하여 조야를 경동시켰다.

 

2) 그 문제의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변방의 일을 논한 대목이 있다. 대마도의 왜구가 쳐들어오는 <치욕>에도 이를 막을 장수가 없고 군졸이 흩어져 왕의 위엄이 떨치지 못한다고 분노했다. 그는 이 일을 <책문(策問)의 제()>에서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일전을 치를 의기와 인물을 고대하노라 했다.

 

지금...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키고 있다.... 아무런 까닭 없이 남의 나라 장수를 죽이고, 나쁨 마음을 품고서 우리 임금의 위엄을 모독하였다. 제포를 돌려 달라는 것은... 조정의 의사를 시험하는 것이고, 대장경을 삼십 부 인출해 가겠다는 것은... 우리를 한번 우롱해 본 것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벌벌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상중이어서 정사를 논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 적을 제압하는 말도 없고, 적의 공격을 막는 계책도 없는가. 송의 한기처럼 반적의 사신을 도성 문밖에서 베기를 청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적에게 예물을 주라는 명을 내린단 말인가.”

 

이는 퇴계의 대처와는 선명히 대조된다. 10년 전, 명종이 즉위하던 무렵 왜구가 사량진을 침입해 오자, 조정은 도마도와의 교류를 단절해 버렸다. 퇴계는 오랑캐를 다루는 중국의 경험과 지혜를 예로 들면서 화친(和親)이 왕도정치의 포용적 원리라고 설득했다. 그리하여 대마도주 종성장(宗盛長)에게 보내는 답서일본국 좌무위(左武衛) 장군 원의청(源義淸)에게 보내는 답서를 쓴 바 있다. 남명은 퇴계의 이 대처를 뚜렷이 의식하고 있었다.

 


3. 

퇴계와 남명, 동갑인 둘의 개성은 너무 달랐다. 차이는 학문과 수양론에만 한정되지 않고 국정을 파악하고 행동을 선택하는데까지 두루 미쳐 있다.

 

요컨대 퇴계가 붓을 들었다면 남명은 칼을 들었다.

 

남명은 외적에 대한 칼을 동시에 조정의 관료들에게로 들이댔다. 그는 타협과 조정을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의 대처는 냉정하고 험준하다.

 

그는 당대를 기강(紀綱)이 없어지고, 원기(元氣)가 풀렸으며, 형정(形政)이 어지러운” <난세>라고 진단했다.

 

기근이 겹치고, 창고는 고갈되고, 제사도 얼룩졌으며, 세금과 공물이 규율을 잃고, 변경의 방비가 비었으며, 뇌물이 일상화되었고, 비방과 모함이 극에 달했고, 억울한 일이 만연하며, 사치 또한 성한그런 시대로 보았다.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가 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나 버렸다.”

 

그 형세는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 동안 벌레에 속을 먹혀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늦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만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름어름하면서 오로지 재물만을 늘리며, 물고기의 배가 썩어들어 가는 것 같은 데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고 있다.”

 

남명은 무진봉사(戊辰封事)에서 특히 서리(胥吏)들이 저지르는 폐해를 우려했다. 실질적 권세가 이들에게 다 있는데 그들이 저지르는 농단과 전횡이 <국맥을 절단 내고>있다면서 이들을 제어할 방책이 시급하다고 진언했다. 그는 임금에게 이렇게 권했다.

 

순임금이 사흉(四凶)을 제거하던 것과, 공자가 소정묘(少正卯)를 베던 것과 같이 하시면 능히 지극히 악을 미워하는 법을 다할 수 있을 것이고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크게 두려워하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임금에게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칼을 쓰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개권 벽두의 그 <서늘한 흰 칼날>이 뒷덜미에 닿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른바 덕()에 의한 <온건하고 유화적인 감화>를 말하지 않는다. 남명은 형벌(形罰)과 위엄에 의한 기강의 확립을 더욱 강조한다.

 

역시 남명은 인()보다 의()의 개성이다. 선을 좋아하는 것보다 악을 미워하는 법을 다 해야하며, 그리하여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크게 두려워하도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화보다 규율을 더 강조했기에 그에게 사람들은 법가(法家)의 혐의를 씌우기도 했다. 농암 김창협은 남명을 오기(李欺)를 배출한 순자(荀子)에 비기기도 했다.

 

남명이 남긴 유산 가운데 큰 것이 상무적 기질(尙氣)과 법가적 전망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감적 유대와 신뢰감에 입각한 사회는 아득한 농경 공동체에 기원한 꿈이요 이상이다. 사회는 규약과 법적 제도의 규율 속에서 기본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그곳은 가정의 친목과 헌신의 원리로는 충분히 제어할 수 없는 2차 관계의 현실인 것이다.

 

조선조는 이 사실을 자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의 자발적 교화만으로는 익명성이 확장되고 일탈의 가능성이 커졌으며, 사적 이기가 팽배해진 사회를 충분히 규율할 수 없다.

 

 

4. 

남명은 도학이란 철두철미 실천의 공부라는 것을 강조했다. 쇄소(灑溯)응대(?對)의 소학(小學)을 온전히 다지는데 집중하자. 이를 건너 뛰어, 이기(理氣)성리(性理)의 담론(談論)에 몰두하는 것은 당나귀 가죽에 기린의 형상을 뒤집어 씌운 것처럼겉은 화려하고 풍성해 보일지 모르나 속은 볼품없이 초라하고 너절해지고 만다.

하학(下學)의 실천 없이 상달(上撻)을 기약하는 것은 이를테면 물건은 사지 않고 흥정만 하다 가는것처럼 소득 없는 노릇이다.

 

큰 도시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며, 금은과 진귀한 물건이 없지 않은게 없는데, 종일 길을 오가며 값을 물어보고 흥정해도, 종내 손 안에 물건은 되지 않는다. 그러느니 베 한필이라도 고기 한 손을 사는 것이 낫다. 지금 학자들이 성리(性理)를 고담(高談)하면서 자신에게 얻는 것이 없는게 이와 무엇이 다르랴.” (언행총록)

 

그는 새벽 닭 울음 소리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띠를 매고서는 어개와 등을 반듯이 세워 그린 듯이 앉았다고 한다. 남명의 실천 중심적 도학은 주자학의 논제에 대한 조선 유학의 논변은 물론, 주자학 자체의 번쇄한 이론 체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주자(周子) 정자(程子)의 입언에 털끝만큼이라도 더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는 경학(經學)에 매달리지 않았다. 경전의 일자 일구를 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경전에 나오는 난해하고 지엽적인 어구들을 등한히 보아 넘겼다. “몸에 절실한 가르침은 깊이 새기고, 다른 것은 대강 지나갔다.” 남명은 경전을 삶의 도구 혹은 조언으로 여겼다. 이것은 경전을 주밀하게 읽고 상세하게 해설하는 퇴계와 선명히 구분되는 태도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주자학적이기보다 양명학적인 풍모가 두드러진다.

 

남명은 경전의 가르침을 내적 자각과 수렴으로 응축시켰다. 그 중심이 바로 경()이다. 경은 문득 놓치기 쉬운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파수꾼이고, 욕망과 이기에 의해 가려진 어둠을 밝히는 빛이며, “진흙이 묻어 더러워진 학을 씻는맑은 물이다. 문제는 이것을 지속적으로 파지하는 일이다.

 

무제

 

대학첫머리에 열여섯 자의 말은

반평생을 공부해도 그 근원을 만나지 못했네

여러 학생들은 넘치는 총명을 타고나

경전을 읽고 외며 마음대로 삼키고 뱉는구나

 

남명은 그 인물과 사상에서 조선 유학의 정형을 벗어나 있다. 그 정도와 진폭은 조선 유학의 어느 누구보다도 크다. 조선 유학의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은 그를 이단적 일탈로 보겠지만, 조선 유학의 규모에 답답해 하는 사람에게는 그는 혁신적 개성이다.

 

역시 남명은 <>보다는 <>의 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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