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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33] 중국 항저우 악왕묘(岳王廟)에서- 사실(史實)과 해석/이만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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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에 〈2018 유홍준과 함께하는 창비 중국답사〉에 동행, 상하이(上海), 자싱(嘉興), 항저우(杭州), 하이옌(海鹽)과 사오싱(紹興) 등을 다녀왔다. 이곳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도 관련 있는 지역이어서 중국의 인문 기행과 독립운동 답사가 겹쳐졌다. 노신(魯迅)·채원배(蔡元培)의 고향에다 육유(陸游)·당완(唐婉)의 애환을 담은 심원(沈園), 왕희지(王羲之)와 관련된 난정(蘭亭)이 있는 사오싱은 처음 가보는 곳이라, 호기심도 없지 않았다. 참가한 분들이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어서 3박 4일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주전파 악비와 주화파 진회의 대조적 운명 

   항저우의 관광 코스에는 악비(岳飛, 1103~1142)의 사당 악왕묘(岳王廟)가 빠지지 않는다. 악비는 남송(南宋, 1127~1279) 때 북쪽 여진족 금(金, 1115~1234)나라의 침략에 맞선 용맹한 장군이다. 그는 20세가 될 즈음(1122) 의용군으로 송(宋, 北宋 960~1126)의 수도 가이펑(開封) 방어에 공을 세웠다. 그의 활동은 북송의 멸망과 남송(南宋, 1127~1279)의 개창 시기에 걸쳐 있다. 1126년 ‘정강의 변’(靖康之變)으로 송의 두 황제 휘종(徽宗)·흠종(欽宗)과 왕족·관료들이 포로가 되어 만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수도 가이펑에 있지 않았던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옮아가 송나라를 재건했다. 이가 남송의 고종(高宗)이다.

    악비는 고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양쯔강(揚子江)과 화이허(淮河) 중간에서 금나라를 방어했다. 이 때 남송 조정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극심하게 분열되었다. 주전파인 악비와는 달리 ‘정강의 변’ 때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한 진회(秦檜)는 화의에 앞장섰다. 주전파와 주화파가 분쟁하는 동안 진회는 군벌 간의 알력을 이용, 주전파를 몰아내고 악비마저 반역죄로 처형하니 나이 39세였다. 그 뒤 진회는 금나라에 ‘신하의 예’를 갖추는 굴욕적인 화친을 선도, 매국노(漢奸)로 지탄받게 되었다. 악비묘에는 한 남자와 여자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철상(鐵像)이 있는데, 진회와 그의 부인 왕천(王天)이다.(전에는 쇠사슬로 온몸을 결박당한 모습이었으나 최근에는 쇠사슬은 없어졌다) 진회가 죽자 얼마 안 있어 악비는 복권되었다. 악왕(岳王)으로 추봉되어 악왕묘에 배향되었고, 충무공의 시호도 받았다. 반면 악비를 죽이고 20여 년간 재상으로 있던 진회는 신왕(申王)으로 추증되었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악비의 복권 시기에 왕작(王爵)이 추탈되었다. 악비는 남송 왕조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복권되기 시작했다.

    150여 년간 계속된 남송은 몽골족 원(元, 1271~1368)에 멸망되고 그 뒤 한(漢)족의 명(明, 1368~1644)나라가 섰다. 이때부터 제갈량(諸葛亮)·악비·문천상(文天祥)이 국가적 영웅으로 숭배되었다. 원(元)의 지배로 중화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받은 명(明)이 한족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악비는 구국영웅으로 다시 탄생하였다. 그 뒤 다시 만주(여진)족 청(淸, 1616~1911)의 지배를 거쳐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이 일어나자 한(漢)족 국가가 회복되었다. 청 왕조를 뒤엎고 쑨원(孫文) 등 민족주의자들이 공화정을 수립하면서 악비는 다시 국가적 영웅으로 올려지는 한편 이민족과 화친한 진회는 매국노
로 낙인찍혔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제국주의의 침탈에 시달리던 한국이나 청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영웅이 필요하였다. 그런 추세에서 악비가 영웅으로 추앙받은 것은 자연스러웠다. 
 
 
현재적 요구에 따라 역사 해석 달라져 

   필자는 대학 시절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 선생의 동양사 강독을 통해 악비의 구국활동에 접했다. 노학자께서는 악비와 진회에 대해 역사적 포폄(褒貶)을 엄격히 했는데 필자의 역사의식은 그쯤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악왕묘 앞에서 전문가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역사인식의 변화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필자의 둔감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 변화가 한족이 아닌 원(元)·청(淸) 시대에 이뤄졌다면 이해할 만하지만, 현재 중국 학술계의 ‘악비논쟁’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듣고는 필자의 둔감을 실감했다.

    현재 중국사에서 악비는 점차 ‘평가절하’되고, 악비묘 앞에서 무릎 꿇고 있던 진회가 재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한족을 비롯한 55개 민족을 하나로 끌어안아야 하는 중국의 ‘역사공정’ 때문이다.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다민족 일체론’)은 중국 안의 다른 민족도 한족과 함께 한 국가 속에 포용하자는 것으로, 이들 간의 과거 전쟁도 민족 내부의 갈등으로 인식하자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는 여진족과의 싸움을 고집했던 악비가 더 이상 통합 중국의 영웅으로 간주될 수 없고 그 대신 주화론자인 진회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더 부합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십 수 년 전에 필자가 악비묘를 처음 참관했을 때 무릎꾼 진회의 철상에 휘감겨 있던 쇠사슬이 최근에 제거된 이유일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이 글은 악비와 진회의 역사를 소개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그들의 예에서 보듯이, 사실(fact)이 같은데도 그 해석이 변화되고 있는 점에 주목해 보았다. 이유는 그걸 평가하는 시기와 주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악비가 상대해서 싸웠던 민족이 만주족이었다는 점에서 한족국가는 악비를 높이 평가했다. 악비의 영웅화는 한족민족주의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56개 민족을 아우르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바탕으로 한 ‘역사공정’이 시도되면서 악비는 더 이상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없었다. 민족간의 ‘화해’를 추진한 진회가 거기에 더 부합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한 ‘역사공정’은 중국 역사 전반에 걸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의 고대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말한 E.H.카를 상기하게 된다. 역사해석에서 현재가 도입됨으로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 되어 간다. 이는 악비와 진회의 인물평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역사에도 고려시대의 ‘천민의 난’을 ‘천민의 신분해방운동’으로 해석한 것이나, 신라의 삼국통일보다는 고려의 통일을 강조하는 것, ‘동학란’을 ‘동학농민혁명’으로 새롭게 인식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는 시도나 역사발전을 설명하는 가치관이 변화되면 역사해석도 달라지는 것을 ‘악왕묘’ 앞에서 새삼 깨닫는다. 
 
 
 
□ 글쓴이 /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사학자(前 국사편찬위원장))
저서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역사의 중심은 나다>,<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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