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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36] 사회는 답을 찾아야 한다/최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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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상 선수
  평소에 스포츠에 관심이 없더라도 올림픽경기의 한두 장면은 보기 마련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한국의 여자컬링 대표팀에 대한 관심이 폭주했다. 아쉽게도 보지 못해서, 큰 감동을 주었다는 “영미!”를 모른다.

   우연히 본 올림픽 경기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남자 피겨스케이팅이다. 음악과 동작이 어우러진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어진 시간에 지켜야 할 여러 규칙과 과제가 있었다. 그것을 자유롭게 해석하고 표현하는 과정이 아름다웠지만, 정작 눈길을 끈 것은 빙상을 질주하다 미끄러진 선수가 용수철처럼 빠르게 튕겨 나와 재도약하는 장면이었다. 해설자가 ‘실. 수.’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바닥을 치고 올라가 다음 동작을 이어가는 모습은 선수의 정신력을 몸으로 구체화한 것처럼 경이로웠다.

   선수는 넘어졌다 일어나는 연습을 무수히 했을 것이다. 능숙한 대처는 훈련의 결과다. 판정을 보니, 감점도 크지 않다. 스포츠 경기의 이해력과 포용력에 대해 다른 차원의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생각했던 일조차 인생의 긴 안목에서 보면 총점에 별문제 되지 않는다(물론 인생살이는 점수제가 아닙니다만.).

  일만 시간의 법칙보다 중요한 것
  올림픽에 참가하기까지 바친 훈련 시간은 얼마나 될까.
   어떤 일에 집중해서 전문성을 갖는 데는 ‘일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심리학자 말콤 글래드웰이 ‘일만 시간의 법칙’을 제안해, 한때 유행처럼 회자된 적이 있다. 하루 3시간, 일주일에 20시간을 집중하면 10년이다. 오래 공부했는데도 아직 전문가로서 자신감이 생긴다기보다는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지 겨우 알게 된 정도이니, 이 법칙에 누구나 해당되는 건 아닌 것 같다.

   16~17세기 조선의 지식인인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野譚)』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무릇 사람이 어떤 일을 함에는 마땅히 19년을 기한으로 삼아야 한다. 진 문공은 외방에 있은 지 19년 만에 진나라로 들어와 패자가 되었고, 소무는 흉노족에게 잡힌 지 19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와 기린각에 초상화가 올려졌다. (중략) 조선에서는 노수신이 19년간 진도로 유배 가서 독서하다가 문장을 이루어 조정에 들어와 정승이 되었다. (중략) 요즘 사람들은 일을 잠깐 하다가 금방 그만두기를 잘해서 하루 만에 그만두기도 하고, 한 달 만에 그만두기도 하며, 1년 만에 그만두기도 한다. 몇 년을 참아내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이내 스스로 한계를 지워서 경박한 사람이 되고 마니, 슬프다. (유몽인, 『어우야담』, 신익철 외 옮김, 돌베개, 2006, 581~582쪽; 인용은 필자가 윤문했다.)

   유몽인은 어떤 일을 잘 해 내려면 적어도 19년이 걸린다고 했다. 거의 이만 시간이다. 과연 그때가 되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전문가가 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결과로서의 능숙함이나 성공이라는 ‘성과’가 아니라, 그 시간까지 정신을 차리고 흔쾌히 갈 수 있게 하는 문화적 동력일 것이다. 과정의 보람과 희망, 누군가의 성장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함께 그 의미를 공유하는 사회적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미투 고백·고발과 #위드유 캠페인
 지금 한국사회는 여러 차례의 #미투 고백과 고발, #위드유 캠페인이 진행 중이다. 용기를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공분의 목소리가 물처럼, 불처럼 번지고 있다. 상처와 충격, 모멸감과 환멸의 몫은 피해 당사자의 것만이 아니라, 진실을 대면한 대중 전체의 것이 되었다. 미적 감동은 훼손되었고, 존경심은 허물어졌다.

   문제는 권력의 남용을 자각하지 못한 자만심에 있다. 그것이 돈이든 지위든 능력이든 간에, 자신이 소유한 권력을 부정당한 방법으로 행사해, 꿈 있고 힘없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폭력이 상처로 인지되고, 사회적으로 알려져 깊은 공감을 얻기까지 걸린 세월을 헤아린다면, 아직 발현되지 않은 폭력 행사가 수반할, 상처의 시간을 줄이는(또는 없애는) 일들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미투, #위드유의 본질은 대상으로서의 ‘성’이 아니라, 약자를 파고드는 통제적 권력의 남용, 개인에 대한 폭력적 권력 행사, 위계사회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에 있다.

  공분은 성찰의 씨앗, 결과보다 과정을 돌봐야
  사회는 무언가를 쟁취하고 이루겠다는 목표 지향적 태도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중단해야 한다. 그보다 과정을 만들어가는 태도와 행동 문법에 대해 충분히 토론하고 거기에 가치를 두는 연습을 해야 한다(당위로서의 과정주의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모델이 필요하다. 예컨대 최근 개봉된 영화 『세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 2017, 기예르모 델 토로)에 나오는 여주인공 친구, 젤다의 처신 같은 것. 영화는 명분을 내세우며 폭력을 행사해 목적을 사수하는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를 ‘악’으로 형상화했다.). 지위와 권력 중심의 사고틀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관계 맺기에 대한 기초부터 다져야 한다.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성과가 아주 뛰어난 전문가가 아니라 스스로의 부족함을 헤아리며 성찰하는 사람이다(전문가의 자격에는 ‘능력체’라는 조건만 고려될 뿐, ‘인격체’의 면모는 누락되는 편이다.). 성과주의적 사고와 권력지향적 태도가 인권을 해치고 사회를 멍들게 했다면, 근본적 차원에서 사회적 가치관과 문화를 재점검해야 한다. 일과 삶의 균형을 일컫는 ‘워라밸’은 개인과 직업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인권과 성장(발전이 아니라 성장이다.)의 균형점을 찾는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참조되어야 한다.

   사회는 우승자에게 메달을 거는 시상대가 되기보다, 사람다움을 확인하며 살 수 있는 보람의 현장이어야 한다. 문제 해결과 상처 회복을 위해 여러 분야에서 마음과 지혜, 생각을 모을 수 있다. 상처받은 것은 사람이지만, 넘어진 것은 사회다. 그간 사회는 수천억만 시간을 연습했으니, 일어설 힘은 충분하다.
   사회는 답을 찾아야 한다.

 

 

□ 글쓴이 / 최기숙(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한국문학 전공))
저서 ,<감정의 인문학>
<감정의 인문학>,<조선시대 어린이 인문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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