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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37] 역관의 마음으로 다시 읽는 허생 이야기/노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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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사람마다 글 읽는 취향이 한결같지 않으니 정해진 법은 없을 터. 빨리 재미를 찾으려는 사람, 천천히 아름다움을 느끼려는 사람, 곱씹으며 의미를 깨치려는 사람의 독서법이 같을 필요는 없다. 의미를 깨치려는 사람들도 무슨 의미를 찾느냐에 따라 제각각일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글의 역사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반드시 합당한 역사적 맥락이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맥락이 투여되지 않는 작품은 줄거리만 있을 뿐 끝내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작품에 따라서는 다양한 맥락이 투과되어 그 의미가 복합적인 경우가 많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수록된 허생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허생이 원한 것은 경제보다 정치 

   허생 이야기의 줄거리는 모두 아는 그대로이다. 한양 남산 묵적골의 가난한 샌님 허생이 굶주린 아내의 역정으로 10년 공부를 도중에 포기하고 한양 제일의 부자 변 씨를 만나 만금을 빌린다. 그는 그 돈으로 국내에서 물건을 매점매석해서 큰 이문을 남기고 마침내 국내의 도적들을 데리고 해외 무인도에 진출하여 농업을 경영한다. 그는 흉년으로 신음하는 일본 장기도에 식량을 팔아 은 백만 냥을 벌고 표표히 귀국해 집으로 돌아온다. 이야기의 끝에 변 씨가 이완 대장에게 허생의 등용을 권유해 이완이 허생의 집을 찾았다가 허생의 꾸짖음을 듣고 달아났다는 유명한 일화가 첨부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는 워낙 다양한 소재들이 얽혀 있는데, 허생이 국내에서 상품을 독점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급기야 해외에 진출해서 해외 무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냈다는 내용은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이라는 맥락에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허생이 국내에서 수익을 올렸던 상품의 독점 판매는 실제로 조선후기 경강상인이나 개성상인의 도고 상업에서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이야기 속 허생이 칼, 호미, 베 등을 갖고 제주도에 가서 제주도의 말총을 모두 사들여 오자 망건 값이 열 배나 뛰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 개성상인도 강진과 해남에 근거지를 마련한 다음 제주도에서 갓이 유입되면 이를 매점매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생 이야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해외 무인도 개척과 대일(對日) 무역인데 사실 해외 통상론은 박제가 같은 북학론자의 대표적 지론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보면 허생 이야기는 조선의 상업 발달을 반영하고 있었고 나아가 해외 통상까지 전망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허생이 원한 것은 경제였는가  허생은 상품을 독점해 수익을 올리는 것을 작은 장사치들이 장사하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물건을 한 곳에 가두면 모든 장사치의 수중이 다 마르는 법이니, 이는 백성을 못살게 하는 방법이야. 뒤 세상에 나랏일을 맡은 이들이 행여 나의 이 방법을 쓰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 나라를 병들게 하고 말 걸세.”라고 비판하였다. 허생은 일본과 통상하여 은 100만 냥을 벌었지만 귀국하는 길에 그 절반이나 되는 50만 냥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에게 해외 진출이란 자신이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지 경세 능력을 스스로 시험했던 테스트에 불과한 것이었다. 허생이 원한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였고, 이런 의미에서 상업 발달, 해외 통상은 부차적인 맥락일 수 있다. 

 
인재를 알아보고 세상을 바꾸도록 도와 

   그런데 허생의 새로운 정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허생 이야기가 들어 있는 『열하일기』의 「옥갑야화」를 다시 읽어야 한다. 사실 허생 이야기가 들어 있는 『열하일기』의 「옥갑야화」는 선비 이야기가 아니라 온통 역관 이야기이다. 중국 건륭제의 칠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중국으로 떠난 사절단의 군관 박지원은 여행 일정 중에 옥갑이란 곳에서 사절단의 여러 비장들에게 밤새 이런저런 역관 이야기를 듣는다. 옛날 중국 수도 북경은 풍속이 순후해 조선 역관이 만금을 빌렸는데 근래는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 조선 역관에게 선뜻 돈을 빌려준 북경의 단골 주인 이야기, 북경 기생집에서 거금을 주고 중국 사대부의 딸을 속신시킨 조선 역관 이야기, 이러저러한 역관 이야기 끝에 박지원이 자기 차례에 일행에게 들려준 허생 이야기, 어쩌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선비 허생이 아니라 역관 변씨가 아니었을까?

    만일 이러한 「옥갑야화」의 맥락에서 허생 이야기를 읽는다면 자연스럽게 변씨의 역할과 성격에 시선이 집중될 수 있다. 변 씨는 한양의 갑부인데 남산 허생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선뜻 거금을 대여했다. 허생이 귀국해서 남산으로 돌아온 후 변 씨는 허생을 자주 찾아가 가계를 보태 주었고 마음의 벗이 되어 주었으며 당시 인재 등용에 힘쓰던 이완 대장에게 허생을 소개시켜 주었다. 허생이 세상에 나와 자신의 경륜을 시험해 볼 수 있었던 것도 변 씨의 도움 때문이었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변 씨의 도움 때문이었으며 허생과 이완의 역사적 만남이 성사된 것도 변 씨의 도움 때문이었다. 역관 변 씨는 허생과 세상을 연결시킨 매개자, 세상 속에서 허생의 배역을 찾아준 조력자, 나아가 허생을 통해 세상을 바꾸기를 열망한 기획자는 아니었을까?

    역관이 기획하고 선비가 정치를 해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 이로부터 조선말기 비밀 결사 개화당의 형성까지 나아간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만약 개화당의 오경석과 김옥균이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안내를 받아 『열하일기』「옥갑야화」속 허생 이야기를 읽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 글쓴이 / 노관범(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부교수)
논저 <기억의 역전>,<고전통변>,<대한제국기 실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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