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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39]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이만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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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에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게 되는데, 거기에 앞서 현행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하다. 학계에서 거론하고 있는 이 주장의 골자는 기념일로 지키는 현행 4월 13일을 4월 11일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인식한 날인가, 밖으로 공포한 날인가 

   현행 4월 13일 기념일은 1989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확정했다. 그때 근거가 된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1919년 4월 11일이지만, 대외적으로 공포된 것은 4월 13일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대외적으로 공포한 날짜를 근거로 기념일이 제정되었다면, 그 기념일은 정부수립에 대한 ‘자기인식’을 근거로 했다기보다는 외국으로부터의 인정을 중시한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 뒤 4월 13일 임정수립일에 이의가 제기되었다. 그것은 4월 13일에 임정수립 ‘공포’를 기록한 자료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과, 정부수립기념일자를 공포한 날보다는 정부 수립이 이뤄진 바로 그 날로 정해야 한다는 ‘자기인식’이 확산되어 갔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는 동안 4월 11일을 임정 수립기념일로 계속 지켜왔다는 것을 밝혀냈다. 해방 후에도 귀국한 임정 요인들은 4월 11일에 기념행사를 가졌고,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사실이 2005년 이후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밝혀지기 시작했고, 이어서 주무관청에 임정수립기념일 변경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여태껏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유가, 한번 결정된 기념일을 쉽게 변경시킬 수 없다는 고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못지않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 자체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변경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된다.

    1919년 3월 1일 시작한 만세운동은 한반도를 휩쓸었다. 50명 이상 모인 시위만 1,542회(혹은 2천 회)에 202만 명(혹은 1천만 명)이 참석했다. 그들은 ‘조선·조선인의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을 선언하면 뒤따르는 것이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그것이 임시정부 수립 형태로 나타났다. 1919년 3, 4월에 연해주와 상해, 서울(한성)에서 각각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세 임시정부는 그 해 9월 상해에서 하나의 임시정부로 통합되었고, 1932년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일본군에 쫓겨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상해·항주·장사·유주 등을 거쳐 중경으로 옮겨 활동했다. 임시정부는 1940년대에 이르러 좌우의 독립군을 통합하여 광복군을 창설했고 좌·우파 독립운동 세력을 합작하여 구성한 의회(임시의정원)와 정부를 갖게 되었다. 

 
3·1 운동의 힘으로 세워진 세 임시정부를 통합해 

   1919년에 세워진 세 임시정부 중 상해에서 조직되어 그해 9월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과정은 이렇다. 1919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13도 대표 29명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토론을 시작, 그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계속했다. 이 회의를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라 했다. 4월 11일 회의를 속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10개 조로 된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운용하기 위해 정부 인선에 착수, 국무총리와 6개부서 총장 등을 선임했다. 이로써 임시헌장 제 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에 명시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과 이를 운용하기 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뒤 제2회~제6회(8월 18일-9월 17일) 회의에서는 세 임시정부를 통합하고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채택,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선출했다. 이제 정부는 한성정부의 정통을 잇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의는 임시의정원과 통합하며, 설치 장소는 상해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여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영도했다.

    해방 후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미 군정은 임시정부가 정부 명의로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김구 등 임정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서울로 귀국했다. 이 점은 연안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동맹과 동북항일빨치산 세력이 평양으로 들어가 소련군 하에서도 정치적 주도권을 쥔 것과 대조가 된다. 완전자주독립통일을 주장하던 임정 세력은 이승만 등의 단정(單政)수립에 적극 반대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협상에 나서기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한민국 30년’에 이뤄진 계승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과 제헌국회는 임시정부 계승을 헌법에 명문화했다. 그들은 제헌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명기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을 재건한다고 했다. 또 현행(1987)헌법 전문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함으로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헌법 전문뿐만 아니라 헌법의 중요한 조항도 임시정부의 헌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우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그대로 계승되었다. 제헌헌법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도 임정헌법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 그대로이며, 대한민국의 국체(공화제)와 정체(민주제)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연설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년(紀年)을 그대로 계승하겠다고 했다. 임시정부가 1919년을 ‘대한민국 1년’이라고 한 연호를 그대로 이어받아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했다.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이 서명한 서류에는 ’대한민국 30년’이라 쓰고 결재한 것이 확인된다. 이는 대한민국이 1919년에 수립되어 그때까지 그대로 계승되어 왔다고 인식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또 영토조항도 제헌헌법 제4조(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가 임시정부 헌법(1945.4.22) 제2조(대한민국의 강토는 대한의 고유한 판도로 함)와 같은 내용이다. 이 영토조항은 임정의 국호·국체·정체·연호와 함께 그대로 대한민국 정부에도 계승되어, 임시정부가 꿈꾸었던 국토회복의 이상을 남북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의 이상으로 명시했다고 할 것이다.

    임시정부의 수립기념일을 제대로 아는 것은 이렇게 대한민국의 뿌리와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 글쓴이 /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사학자(前 국사편찬위원장))
저서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역사의 중심은 나다>,<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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