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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40] 헌법에 정의 조항을/박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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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하나를 둘이 나누어 먹을 때 많이 알려진 공정한 분배 방식이 있다. 한 사람이 사과를 두 조각으로 나누면 다른 사람이 그 가운데 하나를 먼저 선택하게 하는 방식이다. 오리지널 버전은 아버지의 유산을 형제가 나누는 일을 소재로 한 탈무드의 지혜라고도 하는데, 굳이 그런 권위에 기대지 않더라도 어느 문화권에서나 하나씩은 전승되고 있을 법한 지혜이다. 어렸을 적에 엄마가 먹을 것을 나누어 줄 때 크거나 많은 쪽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과 다반사로 다툼을 벌이고, 또 그때마다 울고불고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면 이 방식의 ‘깔끔함’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주로 친구나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하기 싫은 일을 맡기거나 부담 지울 사람을 정할 때 사다리타기가 여전히 위세를 발휘하는 것도 간편함 못지 않게 그것이 가진 공정함 때문이리라.
 

분배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

  집단 속에서 자기 몫에 대한 집착은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지니는 기본적인 욕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욕구는 대부분의 경우 만족스럽게 충족되지는 못한다. 자기와 똑같은 욕구를 지니고 있는 집단 속 다른 사람들 존재 때문이다. 경제 문제의 출발점인 희소성의 원리처럼, 욕구의 대상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것을 향한 수요는 무한정인 상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구성원 각자의 몫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결정하는 문제, 즉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에 대한 논의가 정의(正義) 담론에서 언제나 중심적인 지위를 점하는 배경이다.
 
  분배적 정의란 몫의 배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생명은 공정성(fairness)이다. 전통적으로 이 공정성의 기준과 관련하여 인구에 회자되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모두에게 같은 몫을’과 ‘각자에게 그의 몫을’이다. 거칠게 구분하여 앞의 것이 1인 1표의 평등선거처럼 참정권과 같은 정치적 권리의 배분에 주로 통용되는 원칙이라면 뒤의 것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배분하는 데 많이 적용되는 원칙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앞의 것인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비해 뒤의 것은 상대적으로 ‘능력’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한때 초중등 학교의 무상급식과 노인층을 대상으로 한 기초연금을 둘러싸고 벌어진 보편적 복지 논란도 따지고 보면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우선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 이 두 원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중 한 가지는 정의 담론에서 절대 양보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평등의 가치에 위배됨을 알 수 있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장하는 두번째 원칙이다. ‘그의 몫’이란 말 속에는 이미 불평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의 몫’을 ‘각자의 몫’으로 한다는 것은 배분되는 몫이 ‘각자’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한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 원칙이 정의의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로 줄곧 통용되어 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이 원칙에 암묵적으로 달려있는 단서 조항에 있다. 몫을 배분하는 기준을 세우는 과정이 이해 당사자들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단서이다. 과정이 공정하다면 그로부터 만들어진 기준에 입각한 불평등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취지이다. 정의 담론에서 또 하나의 중요 분야인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가 들어서는 대목이다.
 
  
정의는 과정의 공정성이 중요
 
   우리 사회는 정의에 목말라한 지 오래다. 특히 과정의 공정성과 관련된 절차적 정의에 대한 확립 요구가 비등하다. 사회 곳곳에 잠복해 있는 각양각색의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불만은 이 요구에 기름을 붓는다. 기준없는 분배 체계는 없다. ‘엿장수 마음대로’도 기준은 기준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준의 유무가 아니라 그 기준의 합당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앞의 사과를 공정하게 나누는 방법에 스며있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분배의 기준을 획정할 때는 기준을 정하는 사람이 그 기준이 적용된 결과가 자신에 어떤 유불리로 작용할지 몰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과를 둘로 나눈 사람은 선택의 우선권이 상대에게 있으므로 어느 조각이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사다리타기 게임을 그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선택하고 남은 마지막 사다리가 자신의 것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결과가 자신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미리 알 수 없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가장 불리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규칙을 정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자신이 그 상황에 놓이더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 방향으로 분배 기준을 획정한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공정으로서의 정의’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현대정치철학을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의 학자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는 용어로 이 생각을 정식화시켰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분배의 기준을 획정하는 사람들은 그 기준의 적용 결과가 자신과 어떻게 연관될지에 대해 시종일관 알 수 없는 ‘무지의 베일’ 속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럴 때만 그 기준이 공정하며, 또 그럴 때만 그 결과가 정의롭다는 이유에서다.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첫 걸음
 
정의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귀를 기울여서인지 지금 정부는 틈만 나면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강조한다. 그동안 우리사회의 정의 문제가 제자리걸음이거나 갈지자걸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반갑고 희망적인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구호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절차적 정의의 확립 문제는 특히 그렇다.
 
   가까운 예로,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의원을 뽑는 선거구획정위원회의 구성 과정에 이해 당사자인 의원과 정당이 관여하고, ‘입법권은 국회에 있다’는 명분 아래 관련 법률과 조례를 해당 의회에서 의결하는 구조에서 어떤 절차적 정의가 구현될 수 있을까  곧 있을 6월 지방선거의 지역구 획정 과정에서 소수 정당의 원내진출을 돕는 4인 선거구가 기득권을 가진 거대 정당들의 정략적 의기투합에 의해 대부분 없어져버린 현실이 그것의 난망함을 잘 보여준다. 국회의원 세비를 당사자인 국회의원이 결정하는 구조는 또 어떠한가 
 
   사람의 선의에만 호소하는 제도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실효적이려면 그 선의를 강제할 수 있는 장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정의’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내놓은 헌법개정안에 그와 관련된 조항이 없는 것은 유감이다. ‘정의’가 시대적 요구라는 데 동의한다면 새로 개정되는 헌법에는 어디쯤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조항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회 어떤 분야에서든 ‘무지의 베일’은 고사하고 제 잇속에 가려 법률과 제도를 만드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드는 첫 걸음이다.
 
제○조
 
대한민국은 정의사회를 지향하며, 이의 구현과 관련하여 절차적 정의에 저촉되는
일체의 법률과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 글쓴이 / 박원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중국철학)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철학, 죽음을 말하다>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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