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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산책47] 사람을 올바로 기리는 법/박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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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관 뚜껑이 덮이고 나서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생기게 된 연유나 출전은 모르겠지만 얼추 두 가지 정도 의미로 읽힐 수 있을 듯하다. 먼저,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의 생이 마감된 뒤, 이를테면 ‘역사’가 된 뒤 이루어질 때 공정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살아있을 때 내려지는 평가는 아무래도 이러저러한 이해관계로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고려하면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다른 하나는, 삶의 윤리적 긴장감의 중요성에 대한 환기이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남의 손가락질 받는 일 없이 잘 살아내고도 마지막 한순간 마음을 놓아버림으로써 평생 쌓아 올린 명예를 날려 보낸 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말이다. 아무튼 어떻게 해석하든, 요람에서 무덤까지 다른 사람의 시선 속에서 영위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의 본질을 엄중하게 일깨우는 경구임은 분명하다.
 

인촌 김성수의 경우
 
   각종 재평가 작업을 통해 우리 현대사에서 나름 굵직한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의 역사적 지위가 급전직하의 일들이 잦다. 인촌 김성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각종 인물사전에 소개되어 있는 인촌의 이력은 화려하다. 1891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전후한 공간을 살면서 3.1운동에 참여하고,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라는 지금도 내로라하는 굴지의 언론과 대학교를 설립하거나 중흥시켰고, 경성방직을 세워 일제하 민족자본의 축적을 도모했으며, 해방 후에는 정계에 투신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지도하고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 등의 창당을 주도하여 부통령에까지 올랐다가 이승만의 재집권 책략에 항거하여 그 직을 사임하였다. 이런 삶은 당대인들에게 인정받아 1955년 작고하자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도 추서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선이 굵은 생을 살았던 그의 이런 삶이 근래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일제 말기 행한 친일 행적 때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려 있는 관련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1937년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시국강좌를 맡았고,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으며, 강원도의 춘천과 철원 등지를 돌며 일제에 동조하는 시국 강연을 했다. 다음 해인 1938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이사가 된 후 활동을 펼쳤고, 1939년에는 경성부에 있는 중학교 이상 학교장 자격으로 같은 단체의 참사를 맡았다. 이어 1941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상대로 일제의 징병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조선총독부 기관지격인 〈매일신보〉에 여러 번 실었고, 학도지원병 입소식에 직접 참가하여 축사도 하였다.

   앞의 이력과 여러 가지로 대비되는 그의 삶의 또 다른 장면들이다. 이런 전력으로 말미암아 인촌은 근래 친일 행위자로 최종 판정을 받아 서훈이 박탈되었고, 생가와 고택 등 관련된 기념물들도 현충시설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이에 따라 그의 동상이나 기념물들을 소유하거나 관리하고 있는 지자체와 기관 등에 대해 해당 표지물의 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독립 및 광복 유관 단체들을 중심으로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기실 자신의 친일 이력 때문에 인촌이 겪은 수모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특히 거의 설립자에 준하는 각별한 예우를 받는 고려대학교에서의 그의 위상은 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과 맞물려 전개된 학원민주화의 과정에서 학생들과 학교 당국이 대립할 때면 늘 ‘볼모’의 처지였다. 학교 뒤편에 왕릉처럼 자리잡고 있던 그의 묘소가 1987년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된 것도 학교발전을 위한 공간 확보 차원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계기는 그의 친일 전력을 들어 이전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음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런 와중에서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고려대학교 본관 앞 넓은 교정에 마치 옴파로스처럼 우뚝 서있는 그의 동상은 언제나 수모의 단골 대상이었다. 기단이 스프레이로 덧칠된 각종 구호로 수시로 얼룩졌던 것은 기본이고, 학생들과 학교당국의 갈등이 격화되었을 때는 동상 자체가 매장의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당시 얼굴 부분이 검은 천으로 씌워지고 목에 견인용 밧줄이 걸린 채 앞에 파여진 구덩이를 마주하고 있던 동상의 모습은 관 뚜껑 덮인 뒤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기억이 난다.

 
빛은 빛대로 그림자는 그림자대로
 
   인촌처럼 우리 현대사에서 생전의 삶에 대한 평가가 부침을 겪는 이는 많다. 가팔랐던 역사의 굴곡들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죽은 후에도 평온하게 놔두지 않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삶들에 대한 각진 논쟁이 불붙는다. 그런데 이런 논란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그것이 마치 제로섬(zero-sum) 게임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자신의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 특히 그 가운데 역사적 개인은 충신이거나 역적이거나 양단간에 하나여야 한다는 식이다. 이것이 가능할까  한 사람의 생애를 하나의 색으로 채색하는 것이 가능할까  만약 그렇고 또 그래야 한다면, 상충되는 평가의 여지가 있는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동상은 처음부터 좀 더 튼튼하게 제작해야 할 것이다. 자신에 대한 평가의 부침에 따라 창고를 수시로 들락거려야 하기 때문일 터이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거나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역사적 개인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진행되는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관의 자장 안에 있다. 아울러 같은 시대라도 생각과 기준에 따라 그 자장 또한 중첩되거나 충돌하는 몇 개의 서클을 그려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번 평가가 내려지면 고정불변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장이 형성되면 평가 역시 ‘다시 읽기’ 방식으로 새롭게 진행되는 예가 다반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현명한 대처일까?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한 사람의 역사적 삶은 단일한 색으로만 채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당사자 간에 서로 불편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양이 목적이든 폄훼가 목적이든 적어도 팩트에 입각한 사실만은 관련자들의 합의를 통해 그의 행적에 집어넣자는 것이다. 후세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의 역사적 행위는 동기가 아니라 결과에 의해 공과가 재단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촌의 경우도 그의 친일 행적이 시대적 질곡을 헤쳐 나가기 위한 차선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자발적 부역이었는지는 궁극적으로 그만이 아는 일이다. 그러나 답이 무엇이든 인촌이 결과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그가 벌인 교육사업이나 민족자본 육성, 독재항거 활동만큼이나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이다. 그렇다면, 가령 고려대학교에 세워져 있는 그의 동상 표지석에 지금처럼 그의 생애의 빛만 기록할 것이 아니라 그림자까지 적어 넣는 것은 어떨까? 기리려는 이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일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듯, 모두가 아는 일을 마치 없는 일인 것처럼 감추려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누구라도 자신들이 기리고자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역사적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를 상투적인 미사여구 속에 박제화하지 말 일이다. 그도 우리처럼 생의 고비고비에서 울고 웃고 분노하고 결단하고 환호하고 부끄러워했던 하나의 ‘사람’이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그를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라 믿는다. 관련 정보가 넘쳐날뿐더러 더 이상 위인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밥 먹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았을 것 같은 이미지로 미화한들 그런 거짓 기림이 당사자는 물론이고 후손이나 후학, 후배들에게 얼마나 명예가 되겠는가
?
 
□ 글쓴이 / 박원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중국철학)
저서 <유학은 어떻게 현실과 만났는가>,<철학, 죽음을 말하다>
<근현대 영남 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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