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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선생의 청백리 선정과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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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이원익 선생은 청백리로 선발되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자신이 청렴하지 않다며 사양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이하 이영춘의 '梧里 李元翼의 청백리 정신과 관료적 리더십'에서 인용.

이원익은 1601년(선조 34)에 ‘염근리’로 선발되었다. 이때의 염근리 선발은 이조에서 먼저 대상자를 추천하고 의정부에서 최종적으로 심의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절차를 거쳤다. 1차 심사에는 유성룡(柳成龍) 이원익 등 13명이 선발되었지만 최종 심의에는 이원익 유성룡 허잠(許潛) 이시언(李時彦) 4사람만 통과되었다.(宣祖實錄 137권, 34년 5월 16일(庚辰)) 당시 의정부에서 심사를 주관한 사람은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었다. 그들의 심사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실록(實錄)에 기록된 사관(史官)들의 평가는 아래와 같다.

이때에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여 한 점의 흠이 없는 자는 참으로 많이 얻을 수가 없었지만, 이원익 같은 사람은 성품이 충량하고 적심(赤心)으로 국가를 위해 봉공(奉公)하는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사적인 것을 영위하지 않았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의식(衣食)이 넉넉지 못하여 일생 동안 청빈하였는데, 이는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인데도 홀로 태연하였다.(宣祖實錄 137권, 34년 5월 16일(癸丑))

그러나 이 염근리 선발에 대하여 이원익 자신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자신이 그다지 청렴하게 살아오지 않았으며, 사사로운 청탁을 한 적도 많았다는 내용이다.

신(臣)은 세업(世業)이 풍부하지 못한데다 전란 뒤에 더욱 피폐하였으니, 생활에 힘입을 만한 전택이나 노비가 없고 10년의 전쟁 속에 녹봉이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가족들이 춥지 않게 옷 입고 굶주리지 않게 밥 먹으며 편안히 살아 온 것은 어찌 스스로 농사를 짓고 어찌 스스로 길쌈을 해서이겠습니까?  자세히 따지만 터럭끝 만한 것도 모두 다른 사람의 물건인 것입니다. …… 친구로서 외직에 있는 자가 선물을 보내온 것도 일찍이 받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종시 한 바가 이와 같은데, 무엇 때문에 이런 이름이 신에게 가해 진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신이 탐욕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여 이 이름을 가했다고 하면,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 선발에 참여되어야 마땅합니다. …… 신은 전후를 통하여 집안의 사적인 일을 가지고 남에게 요구하기도 하고, 청탁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남의 이목에 알려져 있으므로 신은 스스로 엄폐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청렴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신하들을 권장할 수 있겠습니까?“(臣世業不豐。亂後尤敗。顧無田宅臧獲之可以資賴。而干戈十年。廩料不繼之日許多。家累衣之食之。安然 過活者。是豈自耕而自織哉。細自思量。分毫皆他人之物。(中略) 其知舊之爲外職者。餽遺以物。亦未嘗不受。始終所爲。章章如此。不知緣何。以此名加於臣哉。若以臣爲不至貪饕而加此名。則在廷諸臣。皆當與是選。(中略) 前後以自家私事。干求於人。請囑於人者。不一而足。在人耳目。臣不得自掩。如是而謂之謹。何以爲人臣之勸哉”( 梧里先生文集 卷 2, 辭被選廉謹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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