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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완평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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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게 여러 이름이 쓰인다.

오리선생의 호는 오리, 자는 공려, 시호는 문충, 휘는 원익이다.

이밖에도 오리 선생을 지칭하는 매우 중요한 칭호로 <완평(完平)>이 있다.

더 정확히는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이다.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헌을 세워 호성공신의 칭호로 받은 것이다.


대동법을 시행한 역사적 인물로 유명한 사람은 김육 선생이다.

하지만 대동법의 시작은 이원익 선생에게 있다.

아래 글은, 김육 선생이 이원익 선생을 그리워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글이다.



꿈에서 완평을 보다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한 채 낙향하는 심정


효종 원년(1650) 1월 평구에 내려온 김육의 심정은 이때 지은 다음 두 편의 시에 잘 나타난다.


세상 나와 서로 인연이 끊어졌는데

어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오.

시대를 도울 만한 밝은 지략 없음에

비방만 불러오고 꾸지람만 불렀으니

대궐문을 나서서 동쪽으로 돌아가

직무 수행 잘못한 책임이나 피하리라.

아아, 시속(時俗)이 궁박하고 위태로워

임금 얼굴 영원히 가로막힘 한스럽네.

가다가는 돌아보고 다시 또 주저앉아

임금 모습 바라보나 붙잡을 길이 없네.

지난날에 내게도 품었던 뜻 있었으니

이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려 하였었지.

좋은 임금을 만나도 뜻 펴지 못했음에

하늘 운수 탓인 줄을 내 이미 알았어라.

..........................

슬프게도 저 창생(蒼生)을 구제하지 못했으니

어찌 다시 조정에 나아가겠는가.

세도(世道)가 끊어진 것을 개탄스러워 하노라.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한 안타까움이 진하게 배어나는 시다.

이런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꿈에 완평부원군 이원익을 보기까지 했다.


임금 사랑 나라 걱정 사생(死生)간에 같았었지.

요행히도 오늘 밤에 꿈속에서 공을 뵈었네.

끝이 없던 그때 당시 안석(安石)의 비방을

지금까지 아이들이 서로 전해 외우는구나.


이원익은 인조 초 삼도대동법을 추진하면서 사림으로부터 왕안석에 견주어 비난받았다.

낙향한 김육은 꿈에 이원익을 볼 정도로, 당시 자신의 처지가 이원익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출처: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이정철 저/ 임수정 옮겨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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