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이원익은 왕실의 종친이었던 태종의 아들 익녕군 치의 4세손으로 태어났다. 1569년 급제한 이후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공직 생활을 수행하였다. 영의정을 여섯 번, 비상상황의 총책임자였던 도체찰사를 네 번 역임하고, 세 번의 전쟁, 세 번의 반란, 일곱 번의 전염병, 다섯 번의 가뭄을 극복해낸 현장 중심의 실천적 행정가이자 경세가였다. 조선 최대의 위기라 일컬어지는 임진왜란 중에는 뛰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대명 외교를 원활히 진행했고, 이순신과 곽재우 등 뛰어난 장수들을 발굴, 직접 군수물자를 모으는 등, 전란에서의 뚜렷한 공로를 세워 호성공신의 칭호를 내려받았다.
또한 전후의 피폐해진 백성들의 살림과 민심을 살펴 불합리한 세 법을 개혁하고자 대동법을 추진하는 등의 국가 안위를 보존하고, 백성의 안민을 위한 일에 탁월한 전문성을 발휘하였으며, 국난의 한가운데에서 혼신의 힘을 바치는 열정적인 지도자였다.
65년 공직생활 중 44년을 재상으로 지냈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행정가였지만 평생의 재산은 두어 칸 짜리 오두막이 전부였고, 직접 돗자리를 짜서 끼니를 잇기도 하였다. 청렴하지 않으면 신뢰를 쌓을 수 없고, 신뢰가 없으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는 그의 청백리 정신은 임금과 조정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그의 등장만으로 백성들은 안심하였고, 그의 존재만으로 정통성과 신망을 얻을 수 있으니 세 번의 임금이 바뀌는 동안 매번 영의정으로 추대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관 이원익의 행적을 기리며 찬탄하길 "이 한 사람으로서 사직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왜적의 진격과 퇴각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윤리 도덕의 퇴보와 융성이 달라졌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었고, 사후에 자신을 기리는 그 어떤 형식도 추구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겨 후대에 널리 알려지기 어려웠다. 그로 인해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재상이 누구인가 고심할 때에 정무 능력과 청렴함을 겸비한 실존 인물로 매번 복기되고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우리 역사의 진정한 위인이다.